0. 그냥 여행에 미친 사람들은 아니다
디지털 노마드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마치 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특이한 종족’의 인간들이 ‘멀쩡한 회사를 대책 없이 충동적으로 그만두고 이곳저곳에 옮겨 다니며 1~2달씩 산다’는 것처럼 그려진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지켜보는 사람들이 대신 걱정해주는 경우도 많다.
“오랫동안 여행하면 집은 어떻게 하냐?”
“모아놓은 돈 다 써버리고 나면 어떻게 하냐?”
“회사 그만두고 다니면, 돌아와서 취업은 어떻게 하냐?”
그렇게 충동적이기만 한 일은 아니다. 물론 외부 사람들이 보기에 그들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이 ‘급진적’일 수는 있겠다. 하지만 디지털 노마드에게 그들의 삶은 ‘일탈’이 아니라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이자 철학 그 자체다. 물론 디지털 노마드라는 개념이 등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 개념을 삶에 얼마나 적용했는지는 각각 전혀 다를 수도 있다. 디지털 노마드에 도전했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꽤 많이 보인다.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모두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회사가 주는 소속감이 꼭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고 믿는다. 그런 사람들에게 “떠나라!”고 말하는 것은 나에게 “한 회사에서 평생 일해라!”라고 말하는 것만큼 고통스러우리라는 것도 잘 안다. 다만 이 글 전체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나와 다르게 살고 생각하는 사람을 이해해보는 기회로 보면 좋겠다.
1. 당신의 시간당 소득은 얼마인가?
한 가지 수학 질문을 해보겠다. 한국에서 한 달에 100만 원을 버는 사람(A)과 500만 원을 버는 사람(B)이 있다. 누가 더 많이 버는가? 이렇게 ‘너무나 당연한’ 질문을 하면 난센스 퀴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대부분은 500만 원이라고 말하겠다. 그런데 저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하는 질문이 하나 있다. 바로 “얼마나 일해서?”라는 질문이다.
총액은 500만 원을 버는 사람이 더 크다. 그런데 한 달에 100만 원을 버는 사람은 한 달에 10시간을 일하고, 한 달에 500만 원을 버는 사람은 한 달에 80시간을 일한다고 생각해보자. 이때는 누가 더 돈을 많이 버는가? 시급으로 생각을 해보면 A는 시간당 10만 원, B는 시간당 6만 2,500원의 돈을 번다. A가 총액은 적을지 모르겠지만 시간당 수입은 더 많다는 결론이 나온다.
예전에 아버지께서 “요즘 젊은 사람들은 저녁이 있는 삶을 살겠다고 월급 적게 주는 회사를 선택한다며? 우리 땐 야근해도 돈 더 많이 주는 직장을 좋아했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이것이 우리 부모 세대가 생각하는 노동이었을 테고 젊은 사람 중에서도 여전히 ‘젊을 때 고생해서 돈 바짝 모아야지’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아마도 저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그럼 시간은 많은데, 돈은 없는 상황이 되는 거 아니야?” 물론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이럴 땐 다시 아래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2. 어디에서 돈을 쓸 것인가?
만약 A가 소득을 유지한 상태로 한국을 떠나서 물가가 싼 태국의 치앙마이로 옮겨갔다고 생각을 해보자. 이럴 때 한국 돈 100만 원의 가치는 치앙마이에서 몇 배 상승한다. 최근 다녀온 아프리카 최남단의 남아공의 예를 들어보자. 특히 케이프타운 생각보다 훨씬 깨끗하고, 음식도 맛있었다.
하루는 트립어드바이저라는 여행 정보 검색 서비스 통해서 맛있는 고급 스테이크 집으로 향했다. 두 명이서 엄청난 크기의 티본 스테이크 하나와 서로인 스테이크 하나, 그리고 와인 한 병에 샐러드까지 시키는 데 든 비용은 3만 원. 식사는 훌륭했고 공간도 쾌적했다. 아마 한국에서 저런 식사를 하려면 못해도 15만 원, 보통은 20만 원 전후로 줘야 할 것이다.
위의 예는 지리적으로 거리가 좀 있지만 동남아시아 나라를 여행하다 보면 정말 물가가 싸고 살기 좋은 나라들이 많다. A는 이런 물가 차이를 이용하면 단 10시간의 노동을 통해 한국에서 300-400만 원에 해당하는 실질 소득의 효과를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럼 예상 질문은 “한국을 떠났는데 어떻게 100만 원의 수입을 유지할 수 있냐?”는 것이다. 어차피 한국에는 고용의 형태로 10시간만 일하고 100만 원 주는 회사 같은 건 거의 없다. 어디서든 일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조건은 ‘일할 장소의 자유‘를 얻는 것이다.
직장인이 이걸 얻기 위해서 주로 사용하는 방법은 원격근무가 가능한 회사에 입사하거나, 혹은 프리랜싱을 하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원격근무가 용이한 개발자나 디자이너로 이직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최근 브런치에서 회사 다니며 자기 월급만큼 프리랜싱으로 일해서 돈을 벌 수 있으면 퇴사하겠다는 목표를 이룬 기획자의 글을 본 적이 있다.
항상 일을 성취하지 못할 이유부터 찾는 사람들이 있다. 프리랜싱이 어렵다고 평가받는 기획자라는 포지션으로도 훌륭히 해내는 사람도 있으니 ‘될까 안될까’ 고민하는 시간에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는 게 낫다’는 이야기다.
“당신이 할 수 있다고 믿든 할 수 없다고 믿든, 그대로 이뤄질 것이다(If you think you can do a thing or think you can’t do a thing, you’re right).”
- 헨리 포드(Henry Ford)
정말 좋아하는 문장이다. 주위를 둘러봐도 항상 그랬다. 만약 도전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이라면 도전 기간만이라도 “정말 될 거 같냐?” “말도 안 된다.” 등의 피드백을 줄 것 같은 사람을 멀리하는 것이 좋다. 그것이 부모라도.
3. ‘뉴 리치’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외국에서는 디지털 노마드를 설명할 때 항상 함께 따라다니는 ‘뉴 리치(New rich)’라는 단어가 있다. ‘새로운 부’라고 번역하면 좋을 거 같다. 보통 영문 자료에서는 뉴 리치라는 말을 그대로 쓰기보다는 같은 의미의 불어인 ‘누보 리쉬(Nouveau riche)’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니 알아두면 좋다.
앞서 두 가지 질문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디지털 노마드’의 삶을 지탱해갈 것인지에 대한 대답이라면 뉴 리치는 철학에 가깝다. ‘부’를 바라보는 다른 시각이자 생활 방식이다. 놀랍게도 한국에서는 단 한 번도 뉴 리치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기존의 ‘부’는 평생을 일해서 모은 돈을 은퇴 후의 삶을 위해 유예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특히 결혼 후 출산까지 하고 나면, 브레이크 없는 폭주 기관차처럼 은퇴까지 달려가는 게 우리 부모 세대의 일반적인 삶이 아니던가.
뉴 리치는 이런 삶의 방식을 거부한다. 이 사람들에게 ‘부’란 평생을 알뜰살뜰하게 모아가며 모든 즐거움을 은퇴까지 미뤄뒀다가 은퇴 후에 그 돈을 조금씩 꺼내 가면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오늘이 중요하기에 주기적으로 일하는 시기와 미니 은퇴를 반복하며 행복을 뒤로 미루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뉴 리치는 돈을 모으기 위해 일상의 모든 즐거움을 포기하는 삶을 경멸하고 여유로운 삶을 지향한다. 다시 말해 뉴 리치는 ‘내가 가진 통장 잔액’이 아니라 삶의 여유를 갖고 ‘정신적으로 자유롭고 삶을 즐기고 있느냐’를 물어보는 것이다.
아버지 세대의 지인이 한 분 있다. 이분은 사업을 하고 있고, 돈도 꽤 많이 벌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분은 부인이랑 중식집에 가면 돈 아깝다고 탕수육을 시키지 말라고 하신단다. 돈도 많은 사람이 뭐 그렇겠냐며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주위에 ‘돈’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꽤 많이 만날 수 있다.
분명히 처음에는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돈을 모으는 행위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의미는 사라져 버리고 행위만 남는다. 그러니 재산 축적에 반하는 행위는 다 못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슬프지 않은가? ‘돈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라는 문장에 반박할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삶을 사는 사람 또한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디지털 노마드가 자연스럽게 향하는 방향
이런 디지털 노마드의 삶은 자연스럽게 자신만의 ‘작은 사업(small business)’를 시작하는 방향으로 흐른다. 왜 그렇냐고? 초기에 디지털 노마드의 삶은 결국 적은 비용이 드는 목적지를 향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디 사람 마음이 그런가. 한 번 나와서 살다 보면 다양한 곳에 가보고 싶은데 모든 곳에서 소득 대비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높은 시급을 주는 프리랜싱의 업무량을 높이게 된다. 이미 공간의 자유는 얻었고, 돈만 충분히 벌 수 있다면 어디든 가서 살 수 있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한계에 부딪힌다. ‘내 시간을 팔아서 벌 수 있는 돈에는 한계가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오면 고민에 잠긴다.
원하는 곳에서 살면서 수많은 클라이언트들과 마주하는 일은 분명 역동적이고 활동적인 삶이다. 하지만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여유를 최대한 즐길 수 있는 삶을 산다’는 뉴 리치의 정신에 위배된다. 이때 사업을 통해서 업무 시간을 최소화하고 싶은 욕구가 생겨난다.
디지털 노마드가 말하는 이 사업은 스타트업이 말하는 투자를 통해서 벨류에이션을 키워나가는 그런 종류의 사업이 아니다. 물론 그런 기업을 키워나가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디지털 노마드가 말하는 대부분의 ‘작은 사업’은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매출을 기다리며 투자로 목숨을 연명하기보다는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조금의 매출을 만들어 내는 데 집중한다.
이 부분은 『부의 추월차선』이라는 책에서 잘 설명해준다. 중요한 것은 ‘확장 가능한 비즈니스’를 설계하고 작은 매출을 점차 확대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본인의 시간을 팔지 않아도 매출이 발생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래 동영상은 『4시간』이라는 티모시 페리스의 유명한 저서를 요약한 내용이다. 책을 읽어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볼만하지만 더 재미있는 점은 이 유튜브를 만든 사람이 가장 마지막에 스스로 이런 수익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밝히는 부분이다. 자신이 읽은 책을 바탕으로 동영상을 기획하고 동영상 편집은 전문 편집가에게 맡긴다. 유튜브에서 제공하는 광고 수익으로 자신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고 한다.
이 동영상의 조회 수는 현재 100만 회가 넘는다. 70만 명이 넘는 구독자와 꾸준히 업로드되는 동영상,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방식을 통해 디지털 노마드의 생활을 하겠다는 의지로 판단하건대 충분히 참고할 만한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디지털 노마드가 어울리는 사람
앞에서도 말했지만 모든 사람이 디지털 노마드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에게 어울리는 삶의 방식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사는 공간에서 벗어나기 싫은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오랜 기간 사귄 친구들과 떠나는 것이 힘들 수도 있다. 지금 속한 조직이 너무 좋은 사람에게도 맞지 않는 사고방식이자 생활 방식일 테고.
디지털 노마드로서 생활하면서 가장 크게 느끼는 점이 있다. 내가 ‘다수’이던 사회를 떠나 외국인이라는 철저한 ‘소수’ 집단에 속한 상태로 살아가는 것을 긍정적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디지털 노마드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쉽게 말해서 외국인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거나 함께 생활할 때 ‘저 사람은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이해가 안 돼.’라는 생각이 들고 참기 힘든 사람이라면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외국에서 살면서 한국 사회가 부여한 각종 사회적 의무에서 벗어난 삶이 즐거웠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디지털 노마드의 삶을 도전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맞지 않는다면 언제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도 되니까.
읽어보면 좋을 책
- 『4시간』(국내 절판, 원서 구매 가능): 티모시 페리스의 너무나도 유명한 책. 주요 내용은 위 동영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니 생략하겠다. 한국에서 2008년에 출간된 책인데 당시 한국 사회가 이런 급진적인 책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에 반해 그간 미국에서는 이 책의 개정판이 나왔고, 책에서 제법 중요하게 다뤄진 외주 관련 책들도 어마어마하게 출간했다. 현재 국내에서는 절판이라 아마존에서 원서로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킨들 앱을 통하면 배송을 기다릴 필요 없이 휴대폰으로도 쉽게 전자책을 읽을 수 있다.
- 『부의 추월차선』(번역, 원서 구매 가능): 정말 많은 사람이 아는 책이다. 위에서도 언급한 ‘시간을 팔아서 돈을 버는 데 한계가 있다.’는 아이디어를 준 책이기도 하다. 저자는 IT 서비스를 통해서 어떻게 자수성가할 수 있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 책에서 등장한 중요한 개념은 확장성(Scalability)이다.
- 『사피엔스』(번역, 원서 구매 가능): 페이스북 대표 마크 저커버그가 ‘책 읽는 한 해’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첫 책으로 선정해서 유명해진 책이다. 인지 혁명, 농업 혁명, 산업 혁명을 거치면서 인간의 삶이 어떻게 달라져 왔는지 설명하며, 놀랍게도 ‘역사가 진보한다’라고 믿었던 순간들이 사실 인간 삶의 질을 형편없이 떨어트렸다고 주장한다. 유목 사회에서 농경 사회로의 전환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고단하게 만들었는지 설명하는 부분에서 현대 디지털 유목민의 삶에 대해서 고민해볼 수 있다.
- 『글로벌 코드』(번역, 원서 구매 가능): 정신분석학자이자 문화인류학자이며 마케팅 전문가로 평가받는 작가의 이력이 매우 독특하다. 전 세계의 디지털 노마드(책에서는 디지털 노마드를 넘어선 ‘글로벌 노마드’라는 개념을 소개하고 스스로도 글로벌 노마드라고 소개한다)를 만나서 인터뷰하면서 집필한 책이라고 한다. 저자는 이런 디지털 노마드의 삶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이미 ‘일상’이라고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여러 외국어를 구사하고 여러 문화를 이해하며, 자신들 만의 커뮤니티를 만들고 서로 정보를 공유하며 전 세계를 누비며 살고 있다고 한다. 당신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누군가에게는 현실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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